평양의 비밀금고 전쟁, 장성택이 불길에 휩싸인 날

2013년 평양 권력의 심장이 불길에 휩싸였다. 겉으론 ‘숙청’이라 불렸지만, 실제로는 ‘돈줄 전쟁’이었다.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2008년 여름, 북한 권력은 중심을 잃었다. 반신불수가 된 김정일은 그때부터 후계자 김정은을 띄우기 시작했지만, 스무 살의 미숙한 후계자를 떠받칠 이는 단 둘뿐이었다. 혈육 김경희, 그리고 권력 기술자 장성택. 김정일은 결국 김정은을 지키기 위해 장성택에게 힘을 실었다. 문제는 그 순간부터였다.
장성택은 ‘행정 담당 부장’으로 시작했지만, 2009년 이후 완전히 다른 괴물이 되었다. 당 조직지도부 산하였던 행정부를 독립시키며, 검찰과 사회안전부(경찰), 사법기관까지 전부 자신 손 아래로 넣었다. 간부 인사부터 예산 승인까지 모든 서류에 그의 도장이 필요했다. 조직지도부 승인만으로는 무효였다. 김정은의 이름보다 장성택의 도장이 더 강력했다. 평양은 그를 ‘2인자’라 불렀고, 실상은 ‘1.5인자’였다.

권력의 뿌리는 돈이었다. 인민군 총정치국 산하의 외화벌이 기관 54부를 흡수하고, 노동당의 비밀 금고 38호실까지 2012년에 해체시켰다. 김정은이 후계자 수업 중이던 그 시기, 북한의 외화줄은 김정은이 아닌 장성택 쪽으로 기울었다. ‘수령의 금고’가 옮겨간 셈이다. 평양 상류층의 아파트, 고급 외제차, 외화 거래 네트워크 모두 행정부를 거쳐야 움직였다. 그는 김씨 일가의 재정라인을 완전히 틀어쥐고 있었다.
2013년 여름, 김정은이 공군 55연대를 시찰하며 비행사 식당을 들렀을 때였다. 반찬이 너무 초라했다. “물고기도 못 먹이나?” 그는 수산사업소를 부대에 배속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문제는 그 사업소가 장성택의 54부 소속이었다는 점이다. 명령이 떨어졌지만, 징상택이 장악한 행정부는 3개월 동안 승인하지 않았다. 최고사령관의 지시가 멈춘것이다. 그리고 사건이 터졌다. 김정은이 보낸 현장 조사단 병사 중 두명이 수산사업소 인원과 몸싸움을 벌이다 몽둥이에 맞아 즉사했다.
보고를 받은 김정은은 두 번 이나 물었다. “진짜 맞아 죽었나?”
확인된 순간, 분노는 폭발했다.

12월 12일, 평양 특별재판소의 차가운 공기가 얼어붙었다. 장성택은 수의를 입은 채 끌려나왔고, 그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러나 방청석엔 누구도 숨을 쉬지 못했다. “국가전복 음모, 최고존엄 모독, 반역 행위!” 판결문이 울려 퍼지자 장성택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날 재판은 형식이었다. 이미 모든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바로 ‘사형’이다. 김정은의 명령이었다.
형 집행은 전례 없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총살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화염방사기가 준비됐다는 소문이 돌았고, 마침내 그날 불길 앞에서 그는 마지막까지 침묵했다. 몸이 재가 되어가는 그 순간, 권력의 중심이 바뀌었다. 그가 장악했던 외화라인, 행정부, 인사권, 모두 김정은에게로 되돌아갔다. 김정일 시대의 잔재, ‘실세 숙부’는 그렇게 불길 속에서 사라졌다.
이 사건은 북한 권력사에서 유례없는 장면이었다. 단순한 숙청이 아니라 ‘정권 세탁’이었다. 김정은은 피로 권력을 세우고, 불로 정통성을 다졌다. 장성택은 마지막까지 “나는 조카를 지키려 했다”며 항변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정은에게 그것은 자신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었고 제거 대상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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