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루프-독재에 맞선 ‘진짜 우익 경찰 영웅’의 비극?

미국 듀크대를 졸업한 유학파 최능진 선생은 평안도 대지주 가문 출신으로, 형제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한 집안의 정신을 이어받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이승만이 권력을 잡을 경우 독재자가 될 것임을 일찍이 예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평양 축구단을 창단하여 경평 축구 대회를 개최한 것은 표면적으로는 스포츠 행사였으나, 실제로는 젊은이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독립운동의 방편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해방 후 최능진은 미 군정 경찰청 수사국장(서열 3)으로 부임했으나, 경찰 내부의 친일파 청산을 강하게 추진하면서 조병옥 경무부장(서열 1)과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1946년 대구 항쟁이 발생했을 때도, 그는 미군정의 실책과 친일 경찰의 만행이 낳은 ‘기아 폭동’으로 규정하고 민심을 대변하려 했다. 하지만 ‘공산당 폭동’으로 몰아붙인 조병옥과의 권력 다툼에서 패배하며 경찰직을 내려놓게 된다.

1948년 제헌국회 선거에서는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을 막기 위해 동대문갑에 출마했다. 당시 그의 지지세가 이승만을 앞섰다는 관측이 우세했지만, 투표 하루 전, 조병옥 등 친이승만 세력에 의해 추천서가 조작되어 후보 등록이 취소되는 ‘사법 살인’을 당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이승만이 주미 대사직 등 고위직을 제시하며 회유했으나 그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이후에도 이승만의 독재에 맞서기 위해 서재필 박사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는 백만 명 서명 운동을 주도하며 투쟁의 끈을 놓지 않았다.
결국 그는 여순사건 주모자로 몰려 옥고를 치르던 중, 한국전쟁 발발 후 서울 수복 시 이승만 정권의 김창룡에 의해 체포되어 1951년 총살당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정치군인의 정치재판을 통한 민간인 총살은 비극”이었다고 한다. 조국과 정의를 위해 헌신한 그의 삶은 2015년 재심을 통해 명예를 회복했다. 최능진의 비극적인 생애는 사상을 초월하여 민족과 정의를 최우선했던 ‘진정한 우익’이 독재 권력에 의해 희생된 한국 현대사의 아픈 단면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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