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양행 유일한 박사의 놀라운 과거 이력

유일한(柳一韓, 1895-1971) 박사는 단순히 유한양행을 창업한 기업가를 넘어, 격동의 시대를 살며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기업 경영의 새로운 지평을 연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인물이다. 특히 그의 삶은 “건강한 국민만이 잃었던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 아래, 기업 경영과 독립운동을 결합하며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삶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1895년 평양에서 태어난 유일한 박사는 9살이던 1904년, 아버지 유기연의 뜻에 따라 미국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어린 나이에 낯선 땅에서 고학하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는 근면, 절약, 그리고 신앙심을 체득했습니다. 1909년에는 독립군 양성을 목표로 설립된 ‘한인소년병학교’에 입교하며 민족의식을 키웠고, 1919년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참가하여 이승만, 서재필 등과 함께 한국의 독립을 외치는 결의문을 작성하고 낭독했다.
미국에서 유일한 박사는 뛰어난 사업 수완을 발휘했다. 대학 졸업 후 제너럴 일렉트릭에 회계사로 입사했으며, 이후 1922년에는 숙주나물 통조림 회사인 ‘라초이 식품회사’를 설립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1925년, 조국을 방문하여 일제 강점하의 동포들이 겪는 질병과 가난의 현실을 목격한 후, 그는 미국에서의 성공적인 사업을 뒤로하고 귀국을 결심했다.

1926년, 유일한 박사는 “건강한 국민만이 잃었던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서울 종로에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그는 민족의 건강 증진과 경제적 자립을 기업의 목표로 삼고, ‘버드나무’ 심볼처럼 민족에게 큰 그늘이 되어주는 기업을 꿈꿨다. 1933년 자체 개발 의약품인 ‘안티푸라민’을 출시하고, 1936년에는 국내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도입하는 등 혁신적인 경영으로 민족 자본 형성에 기여했습니다. 또한, 그는 기업 활동을 통해 얻은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 모범 납세 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유일한 박사의 삶은 기업 경영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후, 그는 미국 전략사무국(OSS)의 비밀 첩보 작전인 ‘냅코(NAPKO) 프로젝트’에 ‘암호명 A’로 참여했다. 5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고된 군사 훈련을 받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그의 용감한 행보는, 20여 년 후 CIA 기밀문서 해제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또한, 1942년에는 재미 한인 무장 독립운동 단체 ‘맹호군’ 창설을 주도하는 등 국내외에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유일한 박사는 기업 경영과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사회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는 경영권을 가족이 아닌 전문 경영인에게 이양하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손녀인 유일링 씨에게 학자금 1만 달러를 제외한 모든 주식을 공익법인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신탁기금'(현 유한재단)에 기증하며, 기업의 이윤이 사회와 교육을 위해 지속적으로 쓰일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그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진정한 기업가이자 사회의 귀감으로 만들었다.
유일한 박사의 삶은 기업이 단순히 이윤 추구를 넘어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민족의 독립과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위대한 증거다. 그의 정신은 오늘날 유한양행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에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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