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소년의 화려한 시작과 귀국의 이유

IQ 210의 천재 소년, ‘한국의 아인슈타인’으로 불렸던 김웅용(현 신한대 교수)은 여전히 신화와 논란의 경계에 서 있다. 그는 어린 시절 한글을 이틀 만에 익히고, 다섯 살 무렵 미적분을 풀며 주목받았다. 1967년 일본 후지TV ‘만국 깜짝쇼’에 출연해 도쿄대생보다 먼저 수학 문제를 풀어냈고, IQ 210을 기록해 기네스북에 세계 최고 지능지수 보유자로 등재도 됐었다. 여덟 살에는 NASA 초청으로 미국에 건너갔으나, “연구 발표가 금지된 고립된 환경에서 살고 싶어 귀국했다”고 회고했다.
돌아온 뒤에도 그의 삶은 쉽지 않았다. 언론은 그를 ‘실패한 천재’라 낙인찍었고, 검정고시 준비 과정에서 과도한 관심을 피해 충북으로 내려가 은둔하듯 살았다. 이후 충북대에 진학해 충북개발공사에서 30년을 근무하며, 틈틈이 대학 강단에도 섰다. 결국 2014년 신한대 교수로 임용되며 그는 또 한 번의 전환점을 맞았다. “실패라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아온 것뿐”이라는 그의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신화에 드리운 의문과 검증의 그림자

하지만 이 화려한 서사에는 의문이 따라붙는다. 1979년 언론 보도에서 그의 부친은 “해외 유학과 NASA 연구원 생활은 사실이 아니며 집에서 가르쳤다”고 밝혔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검정고시 성적은 국어·영어·수학에서 낙제에 가까운 점수를 받아 ‘언어·수학 천재’라는 이미지와는 어긋난다. 콜로라도 주립대나 광업대 학위 이력 역시 공식 학적 기록으로 확인되지 않았으며, NASA가 미성년 외국인을 선임연구원으로 고용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제도적 한계가 지적된다.
결국 김웅용을 둘러싼 이야기는 두 갈래로 나뉜다. 본인이 직접 털어놓은 외로움과 귀국의 이유, 그리고 현재 교육자로서의 삶은 인간적인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나 동시에 과거 언론 보도와 학적·경력 검증 과정에서 드러난 모순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신화와 의문이 공존하는 그의 삶은 “천재”라는 이름이 어떻게 사회적 기대와 언론의 프레임 속에서 부풀려지고 또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한 사례다.
제자들이 기억하는 성실한 교육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그를 ‘성실한 교육자’로 기억한다. 김 교수의 수업을 들은 한 학생은 “교수님은 천재라는 타이틀보다 학생 한 명 한 명의 이해를 우선시하셨다”며 “어려운 개념도 일상적인 비유로 풀어주셔서 오히려 친근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제자는 “교수님은 늘 ‘실패는 없다, 단지 선택이 있을 뿐이다’라는 말을 강조하셨다”며 “그 말이 졸업 후에도 큰 힘이 되고 있다”고 전했다.
김웅용은 지금도 “학생들에게 가장 가치 있는 강의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신화의 진위 여부와 무관하게, 그가 강조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실패가 아니라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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