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없는 마을, 종신 집권의 시작

일본 오이타현의 작은 섬 히메시마무라는 오랫동안 ‘일본의 북한’이라는 별명을 들어왔다. 그 이유는 촌장직이 민주적 절차와는 거리가 먼 방식으로 세습되며, 주민들이 사실상 특정 가문에 종속된 체제를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1911년 태어난 후지모토 쿠마오는 전임자 시카노 가메타로의 방식을 본떠 선거 없이 촌장에 올랐고, “앞으로 촌장선거는 없다”고 선언했다. 이는 곧 종신집권의 선포였고, 실제로 그는 1984년 사망할 때까지 촌장을 지냈다.

쿠마오의 통치는 단순한 권력 독점에 그치지 않았다. 섬의 주산업이던 염전 산업이 몰락하자 그는 마을의 모든 공적자금, 약 1억 8300만 엔을 보리새우 양식 사업에 투자했다. 시행착오 끝에 일본 생산량의 10%를 담당하는 성과를 거두며 주민 대다수를 자신의 회사 직원으로 만들었고, 이로써 섬은 ‘후지모토 왕국’으로 변해갔다.
페리 한 척이 만든 섬의 봉쇄

경제적 성공을 발판으로 권력을 확고히 한 쿠마오는 1972년, ‘히메시마마루’라는 단 한 척의 페리를 통해서만 외부와 연결되는 독점적 해운사를 세웠다. 다른 선박이나 항공기의 입도는 철저히 금지되었고, 반대 세력은 아예 섬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 명목상 공공 소유였던 이 배는 사실상 쿠마오 개인의 사유물로, 섬은 완전히 그의 통제 아래 놓였다.
나아가 그는 주민 재산을 평준화한다는 명목으로 일자리 나누기 정책을 실시해 주민 7명 중 1명을 공무원으로 만들었고, 급여는 낮췄다. 이로써 주민들은 생계와 권력을 모두 후지모토 가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섬 곳곳에는 우상화 교육이 자리잡아 초·중학교에서조차 ‘후지모토 쿠마오 과목’이 있을 정도였으며, 매년 10월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대규모 행사가 열렸다.
세습 권력과 균열의 조짐

1984년 쿠마오가 세상을 떠난 뒤 아들 후지모토 아키오가 권력을 이어받았다. 아키오는 하수도 공사, 요양원 건립, 광케이블 설치, 무료 급식 등 인프라 개선에 재산을 쏟아부으며 지지를 확보했지만 동시에 권력은 더욱 공고해졌다. 그러나 집안 내부에서도 균열은 생겼다. NHK 아나운서 출신이자 한국 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했던 후지모토 토시카즈가 개혁을 주장하며 도전장을 낸 것이다.
2016년, 61년 만에 열린 촌장선거에서 토시카즈는 아키오와 맞붙었지만, 주민 다수는 익숙한 지배 체제를 선택했다. 다만 2020년 재선거에서 표 차이가 크게 줄면서 변화의 가능성도 드러났다.
‘일본 속의 북한’이라는 오명
2024년, 고령을 이유로 아키오가 물러나고 다이카이 야스하루가 새 촌장에 올랐으나 그가 ‘바지사장’이라는 의혹은 여전히 존재한다. 오랫동안 특정 가문에 의존한 체제, 우상화 교육, 외부와 단절된 폐쇄성은 히메시마무라를 ‘일본의 북한’이라 부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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