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교수에서 아프리카로 향한 결단

1933년 충남 청양에서 태어난 한상기 박사는 가뭄으로 힘들어하는 농민들의 모습을 보며 어린 시절부터 농학자의 꿈을 키웠다. 서울대학교 농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며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안정된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안락한 자리를 뒤로하고 인류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더 큰 사명을 선택했다.
1971년, 그는 교수직을 내려놓고 나이지리아의 국제열대농업연구소(IITA)로 향했다. 당시 아프리카 전역은 카사바에 창궐한 진딧물과 바이러스성 병충해로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다. 한 박사의 결정은 단순한 해외 파견이 아니라, 아프리카 대륙의 생존을 건 싸움에 뛰어드는 과감한 선택이었다.
카사바 품종 개량으로 희망을 심다

IITA에서 그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는 카사바 품종 개량이었다. 그는 나이지리아 전역을 누비며 재래종 카사바를 수집했고, 브라질에서 들여온 야생종과 교배하는 연구에 몰두했다. 수년간의 연구 끝에 마침내 병충해에 강하고 수확량이 월등히 높은 ‘내병다수성 카사바’ 품종을 개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새로운 품종은 기존 카사바보다 2~3배 높은 생산량을 보였고, 바이러스와 박테리아에도 강했다. 이 성과는 아프리카 농가에 곧바로 희망을 안겼다. 더 이상 매년 기근에 떨 필요가 없는 안정적인 먹거리가 마련되었고, 이는 대륙 전체의 식량 자급 기반을 마련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농민의 왕’, 추장으로 추대되다

한상기 박사는 연구실에만 머물지 않았다. 직접 트럭에 개량된 카사바를 싣고 마을을 돌며 농민들에게 보급했고, 재배 방법과 농업 기술을 전수했다. 그의 헌신적인 모습은 주민들의 삶을 바꾸었고, 결국 1983년 나이지리아 요루바족의 이키레 마을에서 주민들은 그를 ‘세리키 아그베(농민의 왕)’라는 칭호의 추장으로 추대했다.
외국인에게 부족의 실질적인 권한을 가진 추장 직위를 부여하는 일은 전례가 없었다. 그만큼 아프리카인들이 그에게 느낀 존경과 신뢰가 절대적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단순한 명예 추장이 아니라 실제 마을의 의사 결정에도 참여하며,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아프리카 농업의 미래를 밝히다
품종 개량에서 멈추지 않고 그는 아프리카 농업 인재 양성에도 전력을 다했다. 국제기구와 연계해 농학도들을 교육하고 연구 자금을 확보해주었으며, 그가 훈련시킨 700여 명의 농학도들은 고국으로 돌아가 다시 1만여 명의 후배 과학자들을 길러냈다. 이는 단순한 연구 성과를 넘어 아프리카 농업의 지속 가능한 성장 기반을 마련한 업적이었다.
오늘날 아프리카 여러 나라가 식량 자급 체계를 갖추게 된 것은 그가 뿌린 씨앗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한 박사는 자서전 『작물보다 귀한 유산이 어디 있겠는가』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몸짓이 비에 쓸려 내려가지 않기를 바랍니다”라고 밝혔다. 그의 삶은 단순한 성공담을 넘어, 인류 공동의 식량 안보라는 보편적 과제를 일깨우는 울림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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