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자당의 스타, ‘엄친아’로 떠오르다

2000년대 초, 보시라이는 중국 공산당 내에서 가장 유력한 차세대 주자 중 한 명으로 꼽혔다. 혁명 원로 보이보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이른바 태자당의 핵심 인물로, 준수한 외모와 명문 학벌, 유려한 언변까지 갖춘 ‘엄친아’였다.
다롄 시장 재임 시절, 그는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도시 미관을 개선하며 탁월한 행정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어 충칭 서기로 부임한 뒤에는 복지 정책을 확대해 시민들의 지지를 얻으며 중앙 정치 무대 진입을 눈앞에 두는 듯했다.
추락을 부른 스캔들과 권력 투쟁

그러나 보시라이의 성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내 구카이라이가 영국인 사업가 닐 헤이우드를 독살한 사건과 이를 은폐하려 했다는 의혹, 최측근 왕리쥔의 미국 영사관 망명 시도, 후진타오 당시 주석에 대한 도청 의혹까지 잇따른 스캔들이 그의 이미지를 무너뜨렸다. 특히 왕리쥔의 폭로는 보시라이의 비리와 부패 혐의 수사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보시라이는 문화대혁명 시절 홍위병으로 활동하며 아버지까지 공개 비판하는 등 권력에 영합한 전력이 있었다. 충칭에서 펼친 ‘창홍타흑(唱紅打黑)’ 운동은 부패 척결과 공산당 문화 부흥을 내세웠지만, 과도한 정치적 쇼라는 비판과 인권 침해 논란도 끊이지 않았다.
몰락과 그 후의 정치적 의미

2012년, 보시라이는 정치국에서 축출되었고, 이듬해 뇌물 수수와 권한 남용 등 혐의로 무기징역과 재산 몰수형을 선고받았다. 이는 단순한 개인 비리 사건을 넘어,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 정치사에 불어닥친 최대의 정치적 격변으로 기록된다.
한편 아내 구카이라이는 닐 헤이우드 살해 사건으로 사형 집행유예를 선고받았고,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보시라이의 몰락은 시진핑 체제 강화의 토대를 마련한 사건으로 평가되며, 동시에 권력투쟁 속에서 인민의 지지조차 무력화되는 중국 정치의 어두운 단면을 드러냈다.
권력과 욕망에 눈이 먼 한 정치인의 추락은 개인의 비극을 넘어 체제의 본질을 드러내는 거울이 되었다. 보시라이의 이야기는 권력이 어떻게 인간을 부패시키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얼마나 비극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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