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루프 – 안중근 의사를 존경한 의외의 일본인

1910년 3월 26일 오전, 중국 뤼순 형무소. 동양 평화를 염원하며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순국 직전까지 담담했던 그의 모습과 사상은 일본인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남겼다. 특히 담당 간수 ‘치바 도시치’는 처음엔 적개심을 품었으나, 144일간의 만남 끝에 안 의사의 인간미와 철학에 감복했다.

형 집행 전 치바가 괴로워하자 안 의사는 “너무 괴로워하지 말라”며 ‘위국헌신 군인본분(為國獻身 軍人本分)’이라는 유묵을 써주었다.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니 미안해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후 치바는 제대 후 고향 센다이로 돌아가 안 의사의 위패와 유묵을 모시며 20여 년간 매일 절을 올렸다. 아내와 후손들도 이를 이어갔고, 유묵은 1980년 한국 정부에 반환되어 현재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또한 센다이 대림사의 사이토 다이켄 스님은 일본 극우세력의 위협 속에서도 안 의사를 기리는 추모제를 이어가며 ‘내 마음의 안중근’이라는 책을 펴냈다. 오카야마 정심사의 마쓰다 가이준 스님은 순국 전 유품을 보관했고, 사형을 구형했던 야스오카 세이시로 검사는 오히려 존경의 뜻으로 ‘국가안위노심초사(國家安危勞心焦思)’ 유묵을 받았다.
일본인 변호인, 통역관, 기자 등도 그의 인품에 감동해 유묵을 청했으며, 현재 남은 60여 점 중 상당수가 일본인을 위해 쓴 것이다. 그러나 안 의사의 유해는 여전히 돌아오지 못했다. 남산의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는 일본인 후손이 기증한 유품이 전시돼 있으며, 그의 숭고한 정신은 국경을 넘어 오늘날까지 깊은 감동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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