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의 붓끝, 여성의 피로 그려진 걸작

파블로 피카소는 예술의 신이라 불렸지만, 그의 사생활은 한 편의 혼돈이었다. 영상은 그가 남긴 수많은 명작 뒤에 숨은 인간의 추악함을 파헤친다. 어린 시절부터 피카소는 아버지에게서 그림뿐 아니라 일탈도 배웠다. 미술교사이자 매춘을 즐기던 아버지 호세는 아들을 유흥업소에 데려가 “남자란 이런 것”이라 가르쳤고, 피카소는 그날 이후 왜곡된 욕망과 통제 욕구를 품었다. 7살부터 그림을 배운 천재 소년은 학교를 싫어했고, 늘 구석에 틀어박혀 비둘기를 그렸다. 결국 학교도 포기하고 화가의 길로 뛰어들었지만, 그가 세상에 남긴 건 그림뿐 아니라 수많은 여성의 눈물이었다.

첫사랑은 모델이자 예술가였던 페르낭드 올리비에였다. 그녀를 통해 피카소는 가난의 시절을 벗어나 ‘아비뇽의 처녀들’을 완성했다. 그러나 곧 의처증에 시달리며 그녀를 감금했고, 그녀가 입양한 소녀와의 부적절한 관계 의혹까지 남겼다. 사랑은 영감의 원천이었고, 영감이 사라지는 순간 피카소에게 여성은 버려졌다. 그가 올리비에에게서 떠난 이유는 단 하나, “가난했던 시절이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이후 그는 러시아 발레리나 올가 코클로바와 결혼했다. 하지만 올가의 품격과 절제는 피카소의 자유를 질식시켰다. 그는 집을 떠나 별도의 스튜디오를 차리고, 17살의 소녀 마리 테레즈 발테르와 불륜을 시작했다. 마리가 임신하자 올가는 아들을 데리고 떠났고, 피카소는 재산 분할을 피하려 끝내 이혼하지 않았다. 그의 그림 속 여성들은 점점 일그러졌고, 분노와 욕망이 뒤섞인 얼굴들이 등장했다.

이후 도라 마르가 나타났다. 예술가이자 사진가였던 도라는 피카소와 예술적으로 충돌하며 사랑과 파괴를 오갔다. 마리와 도라 두 여자가 작업실에서 마주쳐 싸웠다는 일화는 전설처럼 전해진다. 피카소는 “한 명을 고를 수 없다”며 방관했고, 그 장면은 훗날 그의 그림 속 찢긴 얼굴로 남았다. 도라는 이별 후 신경쇠약에 시달리며 생을 마감했다.
피카소의 다음 여인은 프랑수아즈 질로였다. 그녀는 케임브리지 출신의 지성과 자존심으로 피카소를 흔들었지만, 그는 사랑을 또다시 폭력으로 변질시켰다. “넌 내 인생을 망치고 있다”는 가스라이팅과 모욕이 이어졌다. 질로는 두 아이를 낳은 뒤 그를 떠났고, 훗날 소아마비 백신을 만든 과학자 요나스 소크와 결혼하며 자신의 삶을 되찾았다.

마지막은 자클린 로크였다. 71세의 피카소가 27세의 로크를 만나 두 번째이자 마지막 결혼을 했다. 그녀는 피카소를 ‘신’이라 부르며 헌신했지만, 그 헌신은 광기로 변했다. 피카소의 장례식에서 가족을 배제했고, 상심한 손자 파블리토는 자살했다. 아들 파울로도 알코올 중독으로 세상을 떠났다. 피카소가 죽자 로크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결국 권총자살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피카소의 천재성은 예술을 넘어 인간의 욕망과 잔혹함까지 함께 담고 있었다. 그는 예술로 영원을 얻었지만, 그 주변의 사람들은 그의 천재성에 파괴됐다. 손녀 마리나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그의 그림은 천재의 서명이 아니라, 가족의 피로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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