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도적 승리가 예상되던 일본 나고야를 서울이 꺽다

1981년 9월 30일 서독 바덴바덴 IOC 총회. 압도적 승리가 예상되던 일본 나고야를 52대 27로 꺾고 서울이 1988년 하계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된 것은 대한민국에 기적이었다. 이 승리는 단순한 스포츠 행사를 넘어선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유치 과정은 절망적이었다. 정부는 1970년 아시안게임 반납의 악몽과 재정 문제로 유치를 포기하려 했고, 유치단은 출발 직전까지도 패배를 예상하며 사기가 저하된 상태였다.
정주영 회장의 집중 공략한 것


이때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유치위원장으로 뒤늦게 투입되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정 회장의 ‘신의 한 수’는 유럽 IOC 위원들이 급성장하는 일본 경제력을 견제하려는 심리를 파악, 이를 집중 공략한 것이었다. 고가 선물 대신 꽃다발을 IOC 위원 부인들에게 전달하는 인간적인 노력과, 이미 80% 이상 공정률을 보인 잠실 주경기장 인프라 역시 신뢰를 얻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올림픽 유치 자체는 신군부(전두환 정권)가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얼룩진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여의주’로 활용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역사는 아이러니하게 전개됐다. 전 세계의 이목이 서울로 쏠린 올림픽을 1년 앞둔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6월 민주항쟁이 폭발했다. 군사정권은 올림픽을 앞둔 국제적 압박을 견디지 못했고, 결국 대통령 직선제를 담은 6.29 선언을 발표하며 국민의 민주화 열망에 굴복했다.
88 서울 올림픽은 전쟁과 가난, 독재의 시대를 마감하고 민주화의 새 시대를 여는 ‘역사의 출구이자 입구’가 되었다. 대한민국이 세계 무대에 당당히 서는 전환점이자, 국민 스스로가 자신감을 회복한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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