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음악 소녀에서 굴곡진 삶의 주인공으로… 박근령, 영욕의 세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차녀이자 박근혜 전 대통령의 동생인 박근령 여사의 삶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극과 갈등을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다. 청와대에서의 유년 시절부터 육영재단을 둘러싼 삼남매의 분쟁, 그리고 파란만장한 결혼 생활까지, 그의 생애를 재조명해 본다.
청와대의 ‘작곡가 지망생’… 어머니의 죽음으로 바뀐 운명
1964년 초등학교 4학년의 나이로 청와대에 입성한 박근령은 당시 넓은 청와대 구조에 어리둥절해하던 순수한 소녀였다. 언니 박근혜와 함께 피아노를 배우고 영화 주제곡을 연주하며 음악가를 꿈꿨던 그는 경기여중·고를 거쳐 서울대 작곡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그의 대학 시절은 평탄치 않았다. 늘 경호원들이 동행하는 자유롭지 못한 생활에 불만을 갖기도 했으며, 호감을 가졌던 남성이 주변의 과잉 충성으로 강제 입대하며 이별을 겪기도 했다. 무엇보다 대학교 2학년 시절 어머니 육영수 여사를 흉탄에 잃은 사건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유학의 꿈을 포기한 그는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수행하던 언니의 개인 비서를 자청하며 곁을 지켰다.
육영재단, 삼남매 갈등의 도화선이 되다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박 씨 일가의 갈등은 육영재단 운영권을 둘러싸고 본격화됐다. 1982년 이사장에 취임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최태민 씨 일가에 운영권을 넘기자, 동생들인 박근령과 박지만 회장은 이에 반발했다.
결국 1990년 두 동생이 노태우 당시 대통령에게 “언니를 최태민으로부터 구해달라”는 편지를 보내는 사태까지 벌어졌고, 그해 11월 박근령이 이사장직을 물려받게 된다. 하지만 이후에도 재단은 부실 경영과 감사 거부 등 끊임없는 풍파에 시달리며 삼남매 다툼의 장으로 전락했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14살 연하 신동욱과의 결혼, 그리고 깊어진 가족의 골
2006년 박근령은 14살 연하의 신동욱 씨와 약혼하며 또 한 번 화제의 중심에 섰다. 박근혜·박지만 두 남매는 이 결혼을 강력히 반대했으나, 박근령은 “믿음직한 사람”이라며 사랑을 택했다.
이 결혼은 가족 간의 결별로 이어졌다. 육영재단 운영권을 놓고 박지만 회장 측과 벌인 법적 공방만 20여 건에 달했으며, 급기야 폭력 사태까지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남편 신동욱 씨는 명예훼손 혐의로 구속되는 등 갈등은 정점으로 치달았다. 박근령은 이사장직에서 물러난 후 생활비가 없어 대출 이자를 연체할 정도로 경제적 고통을 겪기도 했다.
탄핵 정국 속의 화해… “나의 멘토는 형님”

오랜 시간 평행선을 달렸던 삼남매를 다시 묶어준 것은 역설적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사건이었다. 구속을 앞둔 언니의 자택을 박지만 회장이 찾으며 화해의 물꼬를 텄고, 박근령 역시 언니를 “가장 위대한 여성 지도자”라고 치켜세우며 애정을 드러냈다.
그는 남편 신 씨와 함께 태극기 집회에 참석해 탄핵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언니의 명예 회복에 앞장섰다. 지난 세월의 불화에 대해 그는 “어느 가족이든 그 정도의 불화는 있을 수 있다”며 현재는 앙금이 없음을 시사했다.
한때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머물렀으나, 가장 치열한 가족 분쟁의 중심에 서야 했던 박근령. 그의 굴곡진 삶은 개인의 역사를 넘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명암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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