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루프 – 영국 처칠이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에 소극적 자세를 보인 이유

1943년 11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제2차 세계 대전 연합국 정상회담은 일본의 패망 이후 전후 처리 방안을 논의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이 회담의 결과로 발표된 ‘카이로 선언’은 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에 처음으로 천명했다는 점에서 한국 역사에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이 선언문에는 한국의 독립 시기를 ‘적절한 절차를 거쳐’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명시함으로써, 한국의 즉각적인 독립이 아닌 신탁 통치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논란의 중심에는 한국의 독립에 소극적이었던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의 입장이 있었다.
처칠의 소극적 태도와 그 배경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에 대한 문구가 확정되기까지, 영국의 처칠 총리는 다른 연합국 정상들과는 다른 입장을 보였다. 초기 논의 과정에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가 제안한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한국을 독립시키자는 초안을, 처칠은 ‘적절한 시기에’ 또는 ‘적절한 절차를 거쳐’라는 표현으로 수정할 것을 제안했다.
처칠의 이러한 소극적인 태도는 그의 제국주의적 신념과 깊은 관련이 있다. 당시 영국은 수많은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한국의 독립이 자국의 식민지 지배에 미칠 파장을 우려했다. 만약 한국의 즉각적인 독립을 지지할 경우, 다른 식민지들의 독립 요구가 거세질 것을 염려한 것이다.
중국과 미국의 역할: 한국 독립 논의의 역학 관계

반면, 중국의 장제스 주석은 한국의 독립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감명받아 임시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던 장제스는 한국의 독립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이는 단순히 인도주의적인 차원을 넘어, 소련의 한반도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려는 중국의 정치적 계산도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역시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으나, 다만 그 시기와 방식에 있어서는 처칠과 유사한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한국의 즉각적인 독립보다는 일정 기간의 신탁 통치를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국인들이 스스로 정부를 운영하고 유지할 능력이 부족할 것이라는 그의 인식과,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를 고려한 결과였다.
‘적절한 절차’의 의미와 그 파장

결론적으로 카이로 선언의 한국 독립 조항은 중국의 적극적인 지지와 미국의 중재, 그리고 임시정부의 외교적 노력의 결과로 포함될 수 있었다. 그러나 처칠의 영향으로 삽입된 ‘적절한 절차를 거쳐(in due course)’라는 문구는 한국의 즉각적인 독립을 어렵게 만들고, 이후 신탁 통치 논쟁의 빌미를 제공하는 등 한국 근현대사에 복잡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처럼 카이로 선언은 한국 독립의 중요한 국제적 발판을 마련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와 윈스턴 처칠의 제국주의적 시각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물이었다. 이는 국제 정치의 냉혹한 현실과 외교적 타협의 복잡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한국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했던 역사의 단면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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