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루프 – 김구는 왜 안중근의 둘째 아들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나?

안중근 의사의 아들 안준생이 아버지의 위업과는 정반대로 친일 행적을 보인 사건은 독립운동가 김구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김구가 안준생을 민족의 반역자로 규정하고 처형을 요청하기까지 했던 배경과 그 사건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안준생의 변절: 일제의 회유와 굴욕적인 사죄
안준생은 아버지 안중근 의사의 의거 이후 겪은 숱한 탄압과 궁핍 속에서 성장했다. 형마저 독살당하는 비극을 겪으며 생존의 위협을 느꼈던 안준생은 결국 일제의 회유에 굴복하고 말았다.
‘박문사 사건’과 일제의 선전
1939년, 일제는 안준생을 서울 남산 박문사로 불러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분키치 앞에서 아버지 안중근의 죄를 사죄하는 퍼포먼스를 강요했다. 안준생은 일제의 압박과 자신의 안위를 위해 이 굴욕적인 행위에 동참했다.
이 사건은 일제에 의해 대대적으로 홍보되었으며, 안준생은 아버지의 명예를 더럽히고 민족을 배신한 인물로 낙인찍혔다. 당시 언론은 안준생의 행위를 ‘눈물의 화해’로 미화하며 내선일체 정책을 선전하는 데 이용했다.
김구의 분노와 처형 요청
이 소식을 접한 김구는 안준생의 행태에 격분했다. 김구는 안준생을 ‘호랑이 아버지에 개자식’이라 칭하며 민족 반역자로 규정하고, 중국 국민당 정부에 안준생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해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했다.
이는 안중근 가문과 김구 가문의 오랜 인연을 고려할 때 더욱 충격적인 일이었다. 김구는 과거 동학농민운동 당시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인연이 있었으며,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은 김구의 측근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역사적 평가와 안준생의 삶

안준생의 변절은 민족적 비극으로 기록되었으며, 그의 삶은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 겪어야 했던 고통과 굴곡을 보여준다. 비록 일제의 회유와 압박 속에서 굴욕적인 선택을 했지만, 그의 행적은 영웅인 아버지 안중근의 이름에 큰 오점을 남겼다.
안준생의 삶은 역사의 냉혹함과 복잡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단순히 영웅과 역적이라는 이분법적 시각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인간적인 고뇌와 선택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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