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루프 – 한국의 평화를 위해 자원 입대하다 전사한 하버드생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

한국전쟁 발발 당시 하버드 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학생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한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미 해군에 자원입대하여 28세의 꽃다운 나이에 녹번리 전투에서 산화한 윌리엄 해밀턴 쇼(William Hamilton Shaw, 한국명: 서위렴) 대위. 그는 단순한 외국인 군인이 아닌, 한국을 자신의 조국처럼 사랑하고 헌신한 진정한 영웅으로 한국인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다.
1922년 6월 5일, 평양에서 미국 감리교 선교사 윌리엄 얼 쇼와 애들린 해밀턴 쇼 부부의 외아들로 태어난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는 어린 시절부터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평양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 그는 유창한 한국어 실력과 한국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국인 친구들과 스스럼없이 지내며 한국을 제2의 조국으로 여기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 해군 소위로 복무하며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참전했던 그는 전역 후에도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1947년 미 군정청 소속 민간인 교관으로 돌아와 진해의 조선해양경비대사관학교(현 해군사관학교)에서 함정 운용술을 가르치며 대한민국 해군 창설에 기여했다.

미국으로 돌아가 하버드 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밟던 중 한국전쟁 발발 소식을 접한 쇼 대위는 학업을 중단하고 다시 한국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부모님께 보낸 편지에서 그는 “한국인들은 전쟁 중에 자유를 지키려고 피 흘리고 있는데, 제가 흔쾌히 도우러 가지 않고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선교사로 가려 한다면 제 양심이 허락하지 않다.”라며 한국에 대한 깊은 애정과 헌신을 보여주었다.
그의 유창한 한국어 실력과 한국 지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맥아더 장군의 최측근 정보장교로서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크게 기여했으며, 이후 서울 탈환 작전에도 자원하여 미 해병대 5연대 소속으로 참전했다.
1950년 9월 22일, 서울 탈환 작전 중 녹번리 지역에서 북한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28세의 젊은 나이로 전사한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 그의 숭고한 희생은 서울 탈환을 일주일 앞둔 결정적인 순간에 이루어졌다.

그의 묘비에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는 성경 구절이 새겨져 있으며, 한국 정부는 그에게 충무무공훈장, 미국 정부는 은성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전사 후에도 그의 가족들은 한국을 위한 헌신을 이어갔다. 그의 부인 주아니타는 이화여대 교수로, 아들 로빈슨은 서울대 법대 교수로, 며느리 캐럴은 한국 근대사 연구가로 활동하며 한국과의 깊은 인연을 이어갔다.
현재 서울 은평구에는 그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는 ‘은평평화공원’이 조성되어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목원대학교에는 그의 기념 예배당, 기념 비석, 기념 흉상이 건립되어 그의 숭고한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는 한국을 사랑한 진정한 영웅으로, 그의 희생과 헌신은 대한민국이 자유를 지키고 발전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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