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차장 공사 직전, 기적처럼 허락된 발굴

1993년 겨울, 충남 부여 능산리. 원래라면 이 자리는 단순히 관광객을 위한 주차장으로 덮였을 땅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의 우연과 집념, 그리고 ‘한 번만 더 파보자’는 고고학자의 직감과 당시 문화재관리국 담당자의 노력이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보물의 등장을 이끌어냈다.
1992년 가을, 능산리사지 일대에서 1차 시굴조사가 진행됐다. 기와편과 초석 흔적이 나오긴 했지만, 대규모 유적이 확인되지 않자 행정적으로는 이미 주차장 공사를 밀어붙일 분위기였다. 그러나 발굴단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 뭔가 더 있다”는 직감이 그들을 붙잡았다.
사실 이미 상부 결재까지 끝난 상황에서 추가 조사는 불가능했다. 그런데 당시 부여군청 담당자의 전격적인 결정과 문화재관리국의 긴급 예산 지원으로 극적으로 2차 발굴이 진행됐다. 우주의 기운이라도 모인 듯한 이 순간은, 훗날 대한민국 문화재사에서 전환점이 되었다.
진흙 속에서 깨어난 1,300년 전의 걸작

1993년 12월 12일, 서회랑 북쪽 끝 공방지의 구덩이를 파던 중, 흙에 묻힌 채 은은한 빛을 품은 거대한 금속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학예사들이 영하의 물속에서 맨손으로 스펀지를 짜내며 조심스레 수습한 그 순간, “관장님, 이거 박산로 아닙니까?”라는 탄성이 터졌다.
그 정체는 바로 백제 금동대향로(國寶 제287호). 1,400여 년간 진흙 속에서 완벽한 진공 상태로 보존된 이 향로는, 녹 하나 없는 찬란한 모습으로 세상 앞에 다시 나타났다.
‘국보 중의 국보’라 불리는 이유

백제 금동대향로는 높이 61.8cm, 직경 19cm의 대형 향로로, 봉황이 뚜껑을 받치고 산악 모양의 본체에는 신선, 동물, 신비한 상상의 존재들이 정밀하게 새겨져 있다.
특히 제작 기법은 경이롭다. 수은아말감 도금법을 활용해 금빛을 입혔는데, 이는 서양보다 무려 1,000년 앞선 기술이었다. 단순한 종교적 도구가 아니라, 백제 예술·공예·과학이 총체적으로 결집된 ‘종합 예술품’으로 평가받는다.
무엇보다 유물과 함께 발견된 섬유 조각은 누군가 고의적으로 감싸 묻은 흔적이었다. 학자들은 백제가 멸망하던 격변기에 누군가 목숨 걸고 보물을 지켜내려 했다고 해석한다. 그 무명의 백제인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 세대가 이 보물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발굴 순간, 전국을 뒤흔든 충격

발굴 직후 현장은 감격의 물결이었다. “이건 동북아 최고의 걸작이다”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실제로 1971년 무령왕릉 발굴 이후 주춤했던 백제사 연구는 금동대향로의 등장을 계기로 다시 불붙었다.
발표가 있던 1993년 12월 22일, 눈보라가 부는 와중에도 기자들이 몰려와 현장을 취재했고, 이 소식은 신문 1면을 장식했다. 농산물 수입 개방 문제로 혼란스러웠던 나라 분위기 속에서, 이 발굴은 오히려 국민들에게 새로운 자부심과 화제를 안겨주었다.
‘하마터면 묻혔을 보물’이 남긴 교훈

만약 그날, 한 연구자의 집념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 백제 금동대향로는 주차장 아스팔트 아래에 영영 잠들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유물을 단순한 ‘보물’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 그리고 보존의 중요성을 일깨운 기적으로 기억한다. 하마터면 사라졌을 대한민국 최고의 보물, 백제 금동대향로. 그것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한다. “역사는 우연이 아니라, 지키려는 의지 속에서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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