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시험이 뭔지도 몰랐다 — 이재명의 현실적 결정

이재명은 서울대를 가지 않았다. 못 간 것도, 안 간 것도 아니었다. 계산 끝에 다른 선택을 했다. 이유는 돈이었다.
1981년, 그는 등록금을 낼 형편이 안 됐다. 당시 한 달 월급은 6~7만 원. 대학은 멀리 있었다. 그때 중앙대학교가 눈에 들어왔다. 등록금을 면제해주고 매달 20만 원의 생활비를 주겠다는 조건이었다.
“그게 제일 많았어요. 그래서 중앙대를 선택했죠.”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생계가 걸린 문제였다. 만약 서울대가 1원이라도 더 줬다면 그쪽으로 갔을 거라고 했다. 이 말은 거짓이 아니다. 현실적인 선택의 언어였다.

그렇게 들어간 대학에서 그는 학과를 고를 때도 같은 기준을 세웠다.
“뭘 해도 다 마찬가지라면, 제일 높은 커트라인으로 가자.”
그 학과가 법학과였다. 단순한 선택이었다. 꿈도, 계획도 없었다. 그저 주어진 조건 안에서 가장 나은 쪽을 택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무심한 선택이 인생의 방향을 바꿨다. 대학에 들어가서야 그는 ‘사법시험’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시험의 존재도 몰랐던 청년은 그렇게 법을 만났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서울대보다 중앙대를 택한 이유는 오직 20만 원이었다. 더 나은 교육도, 더 높은 이상도 없었다. 생존이 우선이었다. 당시 대학 등록금은 학생의 꿈보다 비쌌고, 가난은 진로를 결정하는 현실이었다.

그의 발언엔 포장도 미화도 없다. “서울대가 1원이라도 더 줬으면 그리로 갔을 겁니다.”
그 문장은 허세가 아니라 한 세대의 현실을 보여준다. 능력보다 형편이 앞섰던 시대, 재능보다 지원금이 더 큰 기준이던 시절의 흔적이다.
결국 그는 그 선택의 결과로 법을 알게 됐고, 그 법이 훗날 그를 정치의 세계로 이끌었다. 하지만 그건 뒤의 일이다.
그때의 이재명은 단지 한 청년이었다. 돈이 부족했고, 선택지가 좁았고, 그 안에서 가장 합리적인 결정을 내린 사람. 그게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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