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님보다 송승헌, 한류 드라마가 바꾼 한 소녀의 운명

북한에서의 충성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자강도에서 살다 국경 도시 회령으로 이사 온 정유나씨는 어린 시절부터 체제에 충실한 소녀였다. 장군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영웅이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다.
회령의 분위기는 달랐다. 자유분방한 공기 속에서 그는 오히려 이방인이 됐다. 학교에서는 혼자였고 마음을 나눌 친구도 없었다.
전환점은 대학 시절 찾아왔다. 가야금을 전공하던 친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랫동네 영화 안 보겠니.”

처음엔 분노가 앞섰다. 최고사령관이 고생하는데 적국 영화를 본다는 발상 자체가 반역처럼 느껴졌다. 그는 친구를 신고할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명분을 만들었다. 비판적으로 보고 친구를 교화시키겠다는 논리였다. 그렇게 한국 드라마를 처음 접했다.
첫 작품은 가을동화였다. 화면을 보던 비장함은 몇 분도 가지 않았다. 송승헌의 얼굴과 말투 앞에서 신념은 무너졌다.
북한 남자들이 “야”라고 부르던 방식과 달랐다. “누구 씨”라고 부르는 호칭은 충격이었다. 여자가 뺨을 때려도 가만히 있는 남자는 상상 밖의 존재였다.
드라마는 단순한 연애물이 아니었다. 인간관계의 방식 자체가 달랐다. 그는 처음으로 ‘존중’이라는 감정을 체감했다.

결정적 계기는 이브의 모든 것이었다. 장동건이 연기한 인물은 수첩 하나로 국경을 넘나들었다. 미국을 자유롭게 오갔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자원봉사 장면도 눈에 들어왔다. 북한에서 배운 남한의 모습과 전혀 달랐다. 그 순간 교육이 거짓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흥미로운 반전은 집 안에 있었다. 딸에게 한국 드라마를 절대 보지 말라던 아버지였다. 그는 술에 취하면 한국 노래를 불렀다.
희미한 불빛 사이로와 칠갑산을 북한식 가사로 개사해 불렀다. 심지어 독도는 우리 땅까지 흥얼거렸다. 말과 행동이 달랐다.

어느 날은 술김에 “최고사령관 동지 오셨다, 문 열어라”라고 외쳤다. 가족 전체가 정치범 수용소로 갈 뻔한 순간이었다.
그는 말한다. 북한 사람들의 절반 이상은 두 얼굴로 산다고. 겉으로는 만세를 외치지만 속으로는 체제를 의심한다.
목숨을 걸고 드라마를 찾았던 이유는 단순한 재미가 아니었다. 자유에 대한 갈망이었다. 한류 드라마는 그의 운명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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