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은 ‘폭풍’이라는 작전명 아래 기습 남침을 감행했다. 김일성의 목표는 명확했다. 광복절 이전에 부산까지 점령하여 적화통일을 완수하는 것이었다.
북한군 1군단이 서울을 직공하는 사이, 최정예 2군단이 춘천과 홍천을 단 하루 만에 점령하고 수원으로 우회 진격해 국군 주력을 포위 선멸한다는 완벽한 시나리오였다.

만약 계획대로 춘천이 당일 함락됐다면 유엔군 개입 전 전쟁은 북한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계산을 뒤엎는 변수가 나타났다. 전쟁 발발 14일 전 6사단에 부임한 김종오 대령이었다. 원칙주의자인 그는 심상치 않은 첩보를 입수하자마자 전 장병의 외출·외박을 금지하고 경계 태세를 최고로 올렸다.

그는 임부택 중령의 7연대를 포함한 장병들에게 강도 높은 전술 훈련과 포병 교육을 실시하며 실전을 준비했다. 육군본부의 침묵에도 그는 “우리 사단만이라도 준비한다”며 소양강 요지에 강력한 화력을 배치했다.

6월 25일 아침, 북한군 2사단이 SU-76 자주포를 앞세워 우두산 방면으로 밀려들자 국군의 105mm 곡사포와 57mm 대전차포가 불을 뿜었다. 준비된 국군의 반격에 당황한 북한군은 큰 피해를 입었고, 작전 실패의 책임을 물어 사단장을 하루 만에 교체하는 수모를 겪었다.

전투는 민·관·군이 하나 된 총력전이었다. 학도병과 시민들은 지게로 4,000여 발의 포탄을 나랐고, 심일 소위 등 특공대원들은 자주포 앞을 가로막는 육탄 공격을 감행했다. 이 72시간의 저항으로 국군은 북한군 2,00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며 적의 발을 묶었다.
이 3일의 지연은 기적을 만들었다. 맥아더 장군이 수원 비행장에서 전황을 확인해 미군 참전을 결정할 천금 같은 시간을 벌어주었으며, 이는 인천상륙작전으로 이어지는 반격의 토대가 되었다. 김일성조차 “춘천의 3일 지연이 전쟁 전체를 망쳤다”고 자책했을 만큼, 춘천 대첩은 대한민국을 구한 역사의 결정적 변곡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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